회맹제나 공신관련 의식을 치르기 위해 필요한 가건물 등 제작을 위한 기록을 담고 있는 ‘소무영사녹훈도감의궤’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627년(인조 5년) 11월 26일, 인조는 이인거의 난을 진압한 공로자들에게 ‘소무공신(昭武功臣)’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반란이 평정된 지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은 시。이었다. 이 공신 책봉의 전 과정은 ‘소무영사녹훈도감의궤'에 빠짐없이 기록돼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규장각에 소장된 이 의궤는 1책 178장의 필사본으로, 반란의 동기와 진압 경위부터 취조한 내용, 공신 결정 과정, 그리고 녹훈도감의 설치와 운영까지를 담고 있다 .
소무공신은 3등급으로 나뉘어 총 6인이 책록됐다 . 1등 공신에는 세 갈래로 군사를 나누어 반란군을 진압한 원주목사 홍보가 올랐다. 그에게는 ‘수충분의결책청난소무공신’이라는 긴 훈호(勳號)가 내려졌다 . ‘충성을 다하고(輸忠), 의를 떨쳐 일어나(奮義), 계책을 결단하여(決策), 난을 맑게 한(淸難)’ 공신이라는 뜻이다. 위기 앞에서 신속히 판단하고 행동한 홍보의 공적이 훈호 속에 응축돼 있다.
흥미로운 것은 2등 공신의 면면이다. 반란 소식에 횡성을 버리고 원주로 도주했던 횡성현감 이탁남이 2등 공신에 오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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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을을 버린 수령이 공신이 된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도주가 원주목사 홍보에게 변란을 가장 먼저 알리는 결과를 낳았다고 평가받은 것이다.
이탁남과 함께 2등에 오른 원극함에게는 ‘수충분의청난소무공신’이라는 훈호가 내려졌다 . 3등 공신에는 이윤남, 신경영, 그리고 이인거의 변란을 처음 고발한 횡성 유학 진극일이 이름을 올렸다 . 무력으로 진압한 자는 물론 위험을 무릅쓰고 반란을 고발한 민간인까지 공신으로 예우한 것은 조선 왕조가 충의(忠義)의 행위를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공신이 책록되면 반드시 뒤따르는 의식이 있었다. 바로 공신회맹제(功臣會盟祭)다 . 왕이 공신들을 거느리고 경복궁 북쪽의 회맹단에 올라, 천지신명 앞에서 배신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나누는 의식이었다 . 새벽 어둠 속에서 거행되는 이 의식의 절정은 ‘삽혈(歃血)’이었다. 소와 닭, 돼지를 잡아 모래가 담긴 구리 쟁반에 피를 받은 뒤, 왕을 필두로 공신들이 차례로 그 피를 입 주위에 발라 마시는 시늉을 했다 .
피로써 맺은 맹세, 곧 혈맹(血盟)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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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땅, 그리고 죽은 짐승의 영혼을 증인으로 삼아 영원한 충성을 서약하는 의례였다.
이 모든 과정이 의궤에 기록됐다. 녹훈도감이 설치된 날부터 해산하는 날까지, 도감의 구성원과 업무 분장, 공신에게 내릴 교서와 철권(鐵券·신하의 공적을 기리고 특권을 보장하던 철로 만든 문서)의 제작, 초상화 제작 여부, 그리고 회맹제의 준비와 집행까지 ‘소무영사녹훈도감의궤’는 단순히 ‘누가 공신이 되었는가’를 기록한 문서가 아니라, 국가가 위기를 관리하고 포상하는 시스템 전체를 투명하게 보여주는 행정 백서였다.
‘소무영사녹훈도감의궤‘는 횡성과 원주가 조선 왕조의 공식 기록 속에 반란과 진압의 현장으로 명확히 등장하는 몇 안 되는 사례라는 .에서 주목된다. 특히 반란의 명분이었던 ‘화친 반대’라는 주장이 당시 지식인 사회의 깊은 분열을 반영한다는 .에서, 정묘호란 직후 조선 사회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창(窓)이 된다는 .도 눈길을 끈다. 이와함께 도주한 현감까지 공신에 올린 조선 왕조의 독특한 논공행상 논리를 살펴볼 수 있어 흥미롭다.
횡성 산골의 은둔 선비가 일으킨 며칠짜리 반란은 그렇게 한 권의 의궤 속에 영원히 봉인됐다. 397년이 지난 지금, 그 기록은 강원도의 땅 위에서 벌어진 작지만 치열했던 역사의 한 장면을 증언하고 있다.
한 것은 조선 왕조